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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세에 받은 고등학교 졸업장

10월 4일
3분 분량

김순실 씨에게 학교는 오래전에 끝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마음 한쪽에 아주 오랫동안 남아 있던 이야기였습니다.


2019년 2월,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일성여자중고등학교 졸업식.


졸업생들 사이에 89세 김순실 씨가 있었습니다.


손에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들려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열아홉 살 무렵 받았을 졸업장이었습니다.


김순실 씨는 그 졸업장을 받기까지 거의 한평생을 기다렸습니다. Korean Senate News



공부보다 먼저 살아내야 했던 세월


김순실 씨는 1남 3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대는 지금과 전혀 달랐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야 했고, 뒤이어 한국전쟁을 겪었습니다.


전쟁은 그녀의 삶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김순실 씨가 졸업식에서 밝힌 사연에 따르면 1·4 후퇴 때 남편을 지뢰 사고로 잃었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을 혼자 키웠습니다.


그녀는 당시를 돌아보며 아들들을 키우기 위해 “안 해본 일 없이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Korean Senate News


학교에 다니고 싶었는지, 무엇을 배우고 싶었는지를 생각할 여유보다 당장 살아가는 일이 먼저였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키워야 했고,


먹고살아야 했고,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공부에 대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학생이 되었습니다


김순실 씨가 다시 책상 앞에 앉은 곳은 일성여자중고등학교였습니다.


이 학교는 가난이나 가정 형편 등 여러 이유로 제때 학업을 마치지 못한 여성들이 다시 공부할 수 있도록 중·고등학교 과정을 운영하는 학력인정 평생학교입니다.


김순실 씨만 특별히 나이가 많은 학생들 사이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해 고등학교 과정 졸업생 212명의 평균 나이는 64세였습니다.


40대, 50대, 60대, 70대….


저마다 학교에 가지 못했던 사연을 가지고 다시 교실로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Yonhap News Agency


그 교실에서 김순실 씨도 학생이 되었습니다.


시험도 보고,


수업도 듣고,


공부도 해야 했습니다.


나이가 많다고 졸업장을 그냥 주는 학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89세에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졸업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여기까지였다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이야기였을 겁니다.


하지만 김순실 씨에게 졸업장은 공부의 마지막 장이 아니었습니다.


그해 그녀는 고구려대학 아동노인복지과에도 합격했습니다.


처음 보도에서는 대학 진학 예정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이후 졸업식 당일 보도에서는 나이를 고려해 멀리 있는 대학 대신 집에서 가까운 마포구 양원주부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할 계획이라고 전했습니다. Yonhap News Agency


어느 학교에 가느냐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였습니다.


그녀는 졸업하고도 공부를 그만둘 생각이 없었습니다.


김순실 씨는 졸업식에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직 청춘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도전할 겁니다.”


89세 학생의 졸업 소감이었습니다. Yonhap News Agency




우리 세대에는 그런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의 시니어 세대에는 공부하고 싶었지만 공부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전쟁 때문에,


여자라는 이유로,


동생들을 돌봐야 해서,


일을 해야 해서,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느라….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보다 먼저 해야 했던 일이 훨씬 많았던 세대입니다.


그래서 어떤 꿈은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냥 너무 오래 미뤄졌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김순실 씨의 공부도 그랬습니다.



89세가 되어서야 늦은 걸까요?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하지 않는 이유를 나이에서 찾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 배워서 어디다 써.”


“이제 와서 뭘.”


“조금만 젊었으면 해봤을 텐데.”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합니다.


무언가를 배우는 데 꼭 써먹을 곳이 있어야 할까요?


졸업장이 취직으로 이어져야만 가치가 있을까요?


그림을 배우면 화가가 되어야 하고,


영어를 배우면 유창하게 말해야 하고,


피아노를 배우면 남들 앞에서 연주해야 할까요?


그냥 내가 해보고 싶어서 하면 안 될까요?


김순실 씨가 89세에 받은 졸업장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졸업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어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일을,


마침내 자기 자신을 위해 해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나요?


꼭 학교일 필요는 없습니다.


한번 배워보고 싶었던 그림일 수도 있습니다.


영어일 수도 있고,


악기 하나일 수도 있고,


혼자 떠나는 여행일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를 배워보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고,


오래전 포기했던 무언가를 다시 꺼내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그런 것이 하나쯤 있을지 모릅니다.


“언젠가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그 뒤에 무엇이 떠오르나요?



김순실 씨는 89세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졸업식 날,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공부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오래 미뤄둔 일이 하나 있다면,


오늘 당장 잘할 필요도 없습니다.


끝까지 할 수 있을지 미리 알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한번 시작해보면 됩니다.


어쩌면 늦은 것이 아니라,


이제 내 차례가 온 것인지도 모르니까요.



공식·주요 출처: 김순실 씨의 졸업 및 대학 합격 내용은 연합뉴스 보도와 서울특별시교육청에 게재된 졸업식 후속 보도를 교차 확인했습니다 . Yonhap News Ag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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